제목: 제23회 열린정책위원회 정기모임 “장항과 군산: 쌍둥이 항구도시 이야기”

일시: 2019.05.11.Sat. 07:30-12.Sun.18:00

장소: 장항과 군산 일원

주관: ESC 열린정책위원회, 국립해양생물자원관 

기록: 전현우

참석자(가나다순): 강범창, 곽혜영, 김기상, 김다은, 김상욱, 김준, 김찬현, 박인규, 유인권, 이강수, 이기욱, 이제은, 이진환, 이하진, 전현우, 하천욱, 한문정, 황선도 (총 21명)

 

(기록자 1인칭의 한계 때문에 보강해야 할 부분이 있으면 말씀 주시기 바랍니다.)

23회 열정위 모임은 5월을 맞이해 지방 일정을 순전히 봄 소풍으로 꾸몄다. 세미나 없이 이뤄진 소풍에 대해 상세 기록을 남기는 이유는, 이번 여행과 같은 프로그램이 ESC가 추진하려 하는 지방 기반 프로그램의 한 축이 될 가능성이 충분하다는 데 참석자들의 중의가 모였기 때문이다. 지방 도시 여행 프로그램을 지속적으로 운영하면, 지방 회원들의 참석을 늘릴 기회가 되는 것은 물론, 각 지방도시의 상황을 눈으로 확인하고 서울/지방 문제의 원인과 해결책에 대해 성찰해 보는 시간을 가질 수 있는 계기가 되어 궁극적으로 지리적 불평등 문제에 대해 ESC가 발언할 수 있게 되는 역량을 기르는 데 중요한 디딤돌이 될 수 있다.

세부 일정 진행 과정은 첨부된 표와 지도를 참조하기 바란다. 일정은 크게 여섯 단계로 이뤄졌다. 일정 해설에, 여행의 배경이 되는 두 항구가 처한 지리적 맥락을 조망하는 한 절을 더했다. 

0.    ‘쌍둥이 항구 도시’의 지리적 맥락.

장항과 군산은 직선거리로 3km 정도밖엔 떨어져 있지 않다. 하지만 두 항구 사이의 금강을 육로로 건널 수 있게 된 것은 하구언이 준공된 1990년이었다. 또한 1987년(강경-세도간 황산대교 개통 시점) 이전, 금강을 건너는 다리는 금강 하구에서 50-60km나 떨어진 부여에나 존재했다. 이것은 두 항구를 쌍둥이로 만들어 준 것은 금강 하구가 제공하는 수로망이지, 지상 망의 긴밀한 연결이 아니라는 뜻이다. 

이들 항구를 가능하게 했던 것은 바로 두 철도다. 군산선, 그리고 장항선. 항구에서 출발해 배후지 깊숙한 곳으로 뚫고 들어가는 노선망 구조는 세계 어디에서나 식민지 철도의 전형이었다. 다만, (바다측) 항구의 이름이 철도의 명칭이 되는 경우가 꼭 흔한 것은 아니다. ‘대련선’이 아니라 ‘남만주철도’이고, ‘몸바사 철도’가 아니라 ‘우간다 철도’라는 사실을 떠올려 보면 그렇다. 장항선의 경우 55년 이전에는 ‘충남선’으로 불렸기 때문에 예외적 명칭이라고 보긴 어렵지만, 군산선의 경우가 있으니 한국의 어떤 특징이 다른 식민지와는 다르게 해항(海港)의 이름을 철도에 붙이게 만들었는지는 향후 비교 연구의 과제일 것이다. 

군산의 배후지는 모두가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전북 동부에 넓게 펼쳐진 남선 최대의 평야 호남평야가 바로 그 배후지다. 미곡을 비롯한 전북의 각종 물산이 1912년 개통된 군산선을 타고 유출된 지점이 군산이다. 반면 장항의 배후지는 철도망을 머리에 넣고 있어야 파악할 수 있다. 서천군만으로는 철도가 성립하기 어려운 이상, 장항선이 그 북쪽에서 훑고 내려오는 보령, 홍성, 예산 모두를 배후지라고 보아야 한다. 장항선이 완전히 개통한 1931년 이후, 이들 지역의 미곡은 경부선 방면 뿐만 아니라 장항 방면으로도 유출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지도를 잘 살펴보면, 약간의 의문이 들 것이다. 보령에도 바다가 있다. 게다가 조선왕조 이래 충청 서북지역의 간선 교통로는 천안에서 분기, 지금의 장항선 축선을 따라 현재의 보령시 오천면에 있던 충청수영으로 향하던 ‘충청수영로’였다. 오천면 일대는 왕조때의 군항인데다, 안면도 남단과 이어진 열도로 외해와 차단되어 풍랑을 피할 수 있는 조건도 갖춘 항만으로 보인다. 이 곳, 또는 대천의 만을 택해 항만을 마련하면 충분하지 않았을까? 게다가 광천에서 장항 사이의 구간은 난공사가 있었던 구간으로 보인다. 천안-광천 사이의 노선은 약 3년만에 완성되었으나(1920-23) 7년이 지나서야 광천-장항 사이가 완전개통(1931)되기 때문이다. 이 구간은 평야 지대인 광천 이북과는 달리 산악 지역이기까지 하다. 장항선을 장항까지 끌어온 것은 당시로서는 상당히 과감한 투자였다는 뜻이다. 

무엇으로 이 투자를 설명해야 할까? 부설측(조선경남철도주식회사)의 1차 사료에 접근하기에 앞서 내리는 가설은 이렇다. 당시 부설측은 금강 하구는 서해안 항로망의 허브라는 점을 감안했을 것이다. 특히 금강 하구에서 약 40km 거슬러 올라간 지점에는 18세기부터 번성한 하항(河港) 강경이 있다. 비록 1920-30년대 이후 장항과 군산이 성장하면서 강경은 상대적으로 축소되지만, 18세기 이래 이 시기까지도 강경은 전국 연안항로의 주요 거점으로 기능해 왔다. 항구 역시 간선 항로 주변에 있어야 많은 화물을 취급할 수 있다는 것은 상식적인 일이므로, 철도 화물수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부설측은 광천이나 보령에서 부설을 그치지 않고 장항까지 철도를 끌어오겠다는 판단을 했을 가능성이 크다. 이 가설이 맞다면, 장항선은 20세기 초반의 철도망 역시 이미 육상과 수상에 확립되어 있던 전근대 교통망으로부터 상당한 영향을 받으면서 성립했다는 하나의 증거가 될 것이다. 

    장항제련소의 준공은 36년으로, 30년대 후반 인천, 함흥 등지에서 집중적으로 이뤄진 한반도 지역 중공업 투자의 일환으로 해석 가능하다. 아직 자료 조사가 충분치 않아 장항선 노선계획과 제련소 계획 사이의 시간적 순서가 불분명하지만, 완공 시기 사이의 시간 차이로 보아 장항제련소는 이미 건설된 장항선에게 영향을 받은 시설로 보아야 할 것 같다. 

배후지의 방향 차이는 경제개발기 두 항구의 운명도 바꾸었을 가능성이 있다. 20세기 후반, 군산은 전주, 익산과 도시 회랑을 이루어 서울, 수도권과 비교적 멀리 떨어진 전북 지역의 도시화 거점으로서 기능한 것으로 보인다. 반면 장항선으로 장항과 연결된 충남 서부 지역은 수도권과 비교적 가까워 서울과 인천 등지로 인구 유출이 주로 일어났으며, 90년대 이후에는 수도권의 팽창으로 아예 천안·아산, 당진·서산과 같은 충청 역내 지역으로도 인구가 이동한 것으로 보인다. 결국 장항은 군산에 비해 훨씬 더 강력한 경쟁자의 더 강력한 압력을 북쪽으로부터 더 크게 받은 지역 같다.

어찌되었든, 두 항구는 최근까지도 육로로 직접 연계되어 있지 않았다. 여행 당시 여러 차례 건넌 “동백대교”는 2018년에야 완공되었다. 구 장항역의 여객열차 운행 중단 직후 장항-군산간 도선이 폐지된지 10년이나 지나서였다. ‘동백대교’의 늦은 개통은 같은 금강구를 공유하면서도, 그리고 자동차의 막강한 영향력이 전국토를 휩쓴지 30여년이 지난 지금에도 두 도시를 사뭇 다른 모습으로 만든 원인이기도 하고, 서울의 힙스터들이 토건 사업에 관행적으로 보내는 힐난에도 불구하고 지방에서 여전히 도로와 철도 건설에 열광하는 이유를 보여주는 장면이기도 하다. 

1.    장항 읍내 탐방. 

전체 참여자에게 공지된 집결지는 장항화물역(구 장항역)이었다. 장항읍내는 마치 막대사탕과 같은 구조로 이뤄져 있기 때문에 택한 위치였다. 여기서 막대는 장항선 철도, 그리고 사탕은 장항읍 시가지다. 역에서 반경 1km 범위 내에 읍의 거의 모든 건물이 몰려 있는 만큼 이 비유는 과장이 아니다. 막대가 빠져나가고 남은 흔적이 있는 구 장항역에 사람들이 모인 것은 11시였다. 국립해양생물자원관장으로 이 곳에 계신 황선도 님께서는 리모델링이 이뤄진 구 장항역사(구내 동측)를 급조된 것이라며 깨끗이 무시하고 모여든 팀을 장항역 구내로 이끌었다. 열차가 사라진 구 승강장과 구내 측선이지만, 아직 신호 장비는 부분적으로 살아 있어 이에 대해 설명했다. 선도 님은 구 선로를 연장시켜 자원관에 연결시키는 구상을 거칠게나마 세우고 계셨다. 

이어서 우리는 역 구내 서측에 위치한 ‘서천미디어센터’와 부설 영화관을 살펴보았다. 인구 수가 네 자리에 육박하는 소읍답지 않게 관내에는 아이들이 가득했다. 더불어 휴일 오전을 맞아 내부에서는 영상 관련 수업도 진행중이었다(확인해보니 토요일 영업, 일 월 정기휴일이다). 즉시 방송이 가능한 스튜디오, 음악가의 창작 공간까지 갖춰진 이 공간은 2014년에 세워져 현재 5년차다. 이미 적지 않은 것을 이룩한 시설이지만, 몇 년 뒤 이 공간이 어떻게 발전해 있을지 기대되는 모습이었다. 

1940년부터는 비슷한 구조였을 네모 반듯한 길 옆에는 세월과 햇빛 앞에 빛이 바래 가는 건물들이 이어졌다. 식당과 다방 골목 사이에 위치한 아귀 조형물을 지나니 점심 장소 ‘유정식당’이 나타났다. 게살을 발라내 버무려 만든 ‘꽃게무침’이 놀라움을 주는 집이었다. 얼마나 많은 수작업이 들어갔을 지 상상이 잘 가지 않았다.

2.    국립해양생물자원관 탐방.
식사를 마치고, 빌린 버스에 참여자 모두가 올라 해양생물자원관으로 향했다. 굴뚝, 장항을 널리 알린 제련소의 굴뚝이 인도하는 방향으로, 제련소에서 나온 슬러지가 가득 묻혀 있는 불모지를 가로질러 가면 해양생물자원관에 도달한다. 비록 외관의 설계 의도에 대한 설명은 듣지 못했지만, 송림 속에 솟아 있는 금속성, 그리고 다공성 외양은 자못 인상적이었다. 해면의 느낌을 주려는 것은 아마도 아니었을 것 같고, 함교나 마스트에 해당하는 부분이 없는 선박 정도의 느낌은 받을 수 있었다. 

성수기를 맞아 학생, 어린이가 가득한 로비 한 가운데에는 “생명의 탑”이 관람객을 맞이하며 위세당당하게 서 있다. 수천 점의 액침 표본들이 해양생물의 다양성이 대체 무슨 의미인지를 가만히 웅변한다. 나는 나름 생물종 문제의 철학적 쟁점을 다룬 번역서(미출간 상태)도 작업해 본 사람인지라, 해양생물자원관(이하 자원관)의 표어 앞부분인 “지구생물의 80%는 바다에 산다”를 문장으로는 잘 알고 있었으나, 표본 무리의 압도적인 힘은 몇 다리를 거쳐 사태를 요약한 진술들과는 비견할 수 없는 것이었다. 새하얀 나선형의 회랑과 천창(天窓)*, 그리고 눈이 시리도록 밝은 햇볕이 생명의 탑을 더욱 돋보이게 만든다. 달빛이 천창을 뚫고 내리쬘 때, 탑과 로비가 어떤 모습일지 잠시 궁금해졌다. 

동선은 엘리베이터를 이용해 4층으로 이어진다. 방대한 전시물, 한 시간 가까이 이어지는 해설사의 해설을 여기 모두 옮기기에는 내 기억도, 지식도, 지면도 짧다. 다만 많은 참여자들이 지적했던 부분은 옮겨두지 않을 수 없다. 수족관에 살아 있는 해양생물을 보여주는 전시 방식을 취하기보다는, 박제나 골격표본을 공중에 매달아 바닷속 공간을 자유롭게 누비는 생전의 모습을 표현하는 것이 자원관 전시의 초점이었다. 

3층에서는 전장 20m에 달하는 보리고래의 전신 골격 3점이 유영하는 모습이 또 한번 사람들을 압도하고 있다. 기술적으로 어려운 박제를 대신하여 설치된 보리고래의 부조 앞에 서면, 카누를 타고 나가 고래와 처음 마주했을 신석기 인들이 느꼈을 경이가 조금이나마 마음에 그려진다. 공간 또한 고래를 모실 것을 염두에 두고 짜여진 모습이었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보리고래가 너무 거대하여 동선상 이들의 뒤에 있고 고래를 본 다음 직후에 마주하게 되는 물개·물범과 대모, 펭귄, 알바트로스가 상대적으로 작아보이는 효과가 생긴다는 점이다. 공간 배치상 보강할 방법이 마땅찮아보여 해결책을 제안하긴 어렵지만, 어쨌든 다음 상설전시 개편에서는 이 부분에 대해 논의가 있었으면 한다.

모두가 해양 생물들과 함께 바닷속을 헤엄치고 돌아온 듯한 감동에 전율하고 있을 때, 복도 한 켠에 마련된 기획전시는 ‘11일 동안의 메뉴’는 잔잔한 충격을 던진다. 장비를 달아 바다로 돌려보낸 붉은바다거북 개체가 단 11일만에 시체가 되어 돌아온 사건의 실체를 파헤친 연구진의 작업을 바탕으로 구성된 이 전시는, 다양한 증거를 조합해 자연상태에서 먹이로 삼았던 해파리와 비닐봉지의 생김새가 너무나 비슷해 거북이 제대로 식사를 할 수 없었기 때문에 죽고 만 것이 아니냐는 설득력 있는 추측을 내놓는다. 숙연한 분위기 속에, 무엇이 가능할지 질문이 오갔다. 플라스틱이 가진 범용성, 그리고 저렴한 가격을 감안하면 상황이 빠르게 개선되리라는 희망을 가지기는 어렵지만, 그런 상황 속에서도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내는 것이 인간이었다는 데는 희망을 걸어 본다.

황선도 님은 내친김에 자원관 내부 빈 공간과 주변 토지를 활용한 여러 구상을 들려 주었다. 임기가 모자라지 않을까 싶을 정도의 방대한 구상인데(정확히 들었던 것은 세 가지: 주민들이 쉬러 오는 제대로 된 까페 조성, 정원 일부에 해수 소통시켜 갯골 조성, 슬러지 매립지에 대규모 습지 조성), 시간이 흘러 다시 방문했을 때 어떤 모습이 되어 있을지 궁금해졌다. 

관람을 마치고 숙소로 이동중에 합류하게 된 몇몇 분들과 장항스카이워크까지 관람할 수 있었다. 관람객들이 모두 풍광에 취해 있는 와중에, 내겐 내내 염두에 두고 있던 지명인 ‘기벌포’가 곳곳에 적힌 것이 뇌리에 남았다. 장항 일대는, 백제 멸망 전쟁과 나당전쟁 당시 세 차례의 상륙작전 또는 수륙 합동작전이 있던 옛 전장이고, 이 전장의 옛 이름이 바로 ‘기벌포’였기 때문이다. 다만 일본측이 5만 병력으로 원정을 왔다 전멸당한 2차 해전과 관련된 일본측의 시설이 없다는 것은 생각 외였다. 일제 당시 일본인들이 자신들의 고대사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물증이 분명한 국제 전쟁을 놓칠 리 없고, 무언가 유허를 남겼을 법한 곳이기 때문이다. 일제의 패망 후 파괴된 것일지. 생각에 잠긴 사람들 위로, 소정방의 13만 당군**이 버드나무 돗자리를 깔아가며 상륙했던 그 갯벌 위로, 상륙작전보다 훨씬 오래 전부터, 그리고 훨씬 오랫동안 이 바다와 갯벌을 지켜왔을 바다새들이 날아가고 있었다.

선도 님이 집무하는 관장실, 연구동까지 둘러본 다음 다시 버스로 돌아와, 장항을 상징하는 제련소 굴뚝 서측, 금강구 갯벌 옆 수로 앞에 새로 건설한 물양장(lighter’s wharf)에 도달했다. 아직 포털 위성지도에는 이 물양장이 공사중인 모습만 떠 있있는 상태다. 현지 정보에 밝은 황선도 님이 아니었다면 신 물양장에서 볼 수 있는 광경을 놓칠 뻔 했다. 

신 물양장은 장항 제련소 굴뚝을 가장 잘 관람할 수 있는 자리였다. 이 굴뚝이 100m 높이로 솟아 있는 이유는 결국 오염물질을 최대한 높은 대기에 내뿜어 희석시키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수십년에 걸친 동광석 제련 덕분에, 이들 오염물질은 장항 지역은 물론 멀리 직선거리 60km 바깥의 공주에도 피해를 끼쳤다고 한다. 굴뚝을 이용한 공정이 완전히 중단된 것은 1989년의 일이고, (이후 제련소는 동광 제련을 전기로로 하고 있다) 장항 일대의 토지 정화 사업이 시작된 것은 2013년이며, 지금도 주변은 분주하게 토지 정화사업이 진행중인 듯했다.

이 곳 신 물양장은 뻘이 가득 퇴적되어 더 이상 사용이 불가능해진 구물양장을 대체하기 위해 건설된 곳이다. 금강 하구둑 건설 이후 뻘 퇴적이 극심해졌고, 준설이나 부잔교 연장으로는 해결하기 어려운 상황이 된 것으로 보인다. 이 곳의 부잔교는 쇠사슬로 높이를 조절하는 군산측이나 구 장항항 부잔교의 구조와는 달리 독특한 철제 구조를 쓰고 있어 이채로웠다. 황선도 님은 여기서도 이곳을 어구가 어수선하게 널려 있는 어항으로 내버려두기 보다는 사람들이 와서 즐길 수 있는 곳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열변을 토하셨다. 

장항 읍내를 차량으로 통과하던 중, 우리는 구 도선장 부근에 있는 ‘장항 문화예술 창작공간 미곡창고’에도 잠시 들렀다. 과거의 골조, 그리고 콘크리트 구조는 그대로 남긴 채 철강으로 보강한 건물 속에는 일제시대부터 경제개발기에 이르는 장항의 사진이 전시되어 있었고, 입주 작가들의 작업물들이 옆에 함께 놓여 있었다. 과거의 기반 위에 새로운 힙한 작업들을 더하려는 시도를 건축적으로, 그리고 내부 배치를 통해 보여주는 건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 뉴욕 구겐하임 미술관과 자원관의 회랑·천창이 서로 닮았다는 이야기를 본문에서 하면 매우 남사스러울 것 같아 주석에만 남긴다.
** 인천상륙작전 당시 미 제10군단의 규모(2개 사단 7.5만 명)보다 크다. 한국사 전체에서 두 번째로 큰 상륙군 규모로 보인다. 첫 번째는 661년 8월에 전개된 당의 고구려 방면 상륙작전 당시의 규모로, 이 당시 동원된 당군의 수는 편제에 비추어 볼 때 30-40만에 달하는 것으로 보인다.

3.    군산 구시가 탐방

해질녘이 되어, 앞서 언급한 동백대교를 건너 군산 구시가로 자리를 옮겼다(18시경). 식사 시간이 다 되었다는 점 때문에, 가장 먼저 들린 곳은 이성당 별관이었다.* 당초 나는 볼 때마다 당혹스러울 정도로 긴 줄을 서야 진입할 수 있는 것으로 보이던 이 곳을 들릴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는데, 이는 큰 오판이었다. 많은 인원을 수용할 수 있고, 간식과 음료를 해결할 수 있으며, 잠시 앉아서 쉴 수 있는 공간은 두자리 수 인원이 참여하는 투어 루트를 구상할 때 반드시 여럿 파악해 두어야 한다. 저녁 식사를 해 버리면 대인원이 모두 퍼져버리게 되어 더 이상의 도보 이동은 어렵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성당과 같은 빵집의 가치는 더욱 크다.

군산 구시가는, 과거의 기억이 담긴 가로 구조와 일제시기 건설된 가옥들 사이사이에 지속적으로 현대의 기억이나 상업적 시도가 덧붙어 누적되고 있는 공간이다. 둘러본 주요 명소의 건축 시기에 따라 살펴 보더라도, 이 공간 속에는 일제 침략 이후 여러 시대의 흔적이 켜켜이 쌓여 있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1공 시기에 건설되어 최근 리모델링한 ‘호텔 항도’, 98년 영화의 배경을 2003년 다시 재현해 놓은 ‘초원사진관’, 74년 준공된 ‘군산뇌병원’ 건물, 1935년 준공되어 원형이 거의 그대로 남아 있는 신흥동 ‘히로쓰가옥’, 2002년 백화양조 구 공장을 철거하고 들어선 아파트, 일식 대웅전이 그대로 남아 있는 동국사, 그리고 최근 10여년간 골목 곳곳에 들어선 이른바 힙한 가게들까지. 80년대를 제외하면 거의 모든 시기의 건축물을 확인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용도 면에서도 상업 시설 뿐만 아니라 대규모 교회당과 아파트, 원불교 교당, 그리고 옛 관공서 건물까지 확인할 수 있었다. 3월에 둘러본 목포 구도심과는 달리, 오래된 도시답게 변화의 속도는 느리지만 군산 구도심의 시간은 천천히 앞으로 가고 있는 듯 했다. 여기에 1998년 철거된 구 군산시청**이 도서관이나 박물관으로 남아 공간의 중심을 잡고 있었다면 하는 아쉬움은 떨치기 어렵긴 해도 그렇다. 

어느덧 해가 지고 식사를 할 시간이 되었다. 식사 장소는 지금의 ‘대학로’ 즉 조계지의 동측 경계 도로를 건너간 곳 골목 깊숙한 곳에 있었다. 당초 목표였던 ‘순돌이곱창’은 사람이 너무 많아 좀 더 깊숙한 곳에 있는 ‘안동집’으로 장소를 옮겼다. 다만 지도를 다시 보면서 검토해 보니 월명로를 따라 이동했던 것은 약간의 실수였던 것 같다. 최대한 큰 길 안쪽의 구불구불하고 약간의 경사가 있는 골목길을 따라 움직이는 것이, 군산의 도시 구조에 대한 이해를 돕는 동선 구성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 주변에 약간의 폐를 끼친 부분도 있긴 했다. 이성당 바로 앞 길에서 20명이 하차하는 바람에, 버스 뒤편으로 다섯 대 또는 그 이상의 차량이 밀려 있었기 때문이었다. 주변에 주차장이 없어 해결이 어려운 부분이긴 했는데, 교차로에서 최대한 먼 곳에서 하차를 하는 것은 필요할 것 같다.
** 조금 더 찾아보니 지금 구 시청공원이 된 부지에는 2018년까지 의류 상가(로데오 건물)가 설치되어 있었다고 한다. 포털 사이트 지도 항공사진으로도 이 건물 확인이 가능하다. 이런 우여곡절도 사람들이 도시와 이 공간에 무엇을 기대했는지 보여주는 것인 만큼 무시할 기억은 아니겠지만, 착잡한 마음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다.

4.    장항의 아침
술자리에서 있었던 일들은 참여자 각자의 기억속에만 남기기로 한다. 다만 장항에도 00:30분에 자리를 파해도 괜찮을 정도로 늦게까지 영업하는 술집이 있었다는 것은 특기할 만 했다. 인구가 거의 네 자리에 육박하는 이 곳에서 대체 누구를 기반으로 이런 영업이 가능한 것일 지. 다만 장항역 남측의 선로변을 걸어가며 전차대에 대한 설명을 했던 기억, 그리고 경찰서 앞, 항구의 밤 특유의 스산한 분위기를 풍기는 길을 걸으며 동광석 슬러지로 된 벽돌 실물을 확인했던 기억은 기록해둘 만 하다. 

아침은 두 곳으로 나누어 먹었다. 다수의 사람들은 ‘천국식당’으로 향해 소고기 무국과 김치찌개를 먹었다. 황선도님과 3인의 멤버는 ‘왕자다방’으로 향했는데, 직접 그 식단을 접하지는 못했으나 커피, 계란 후라이(2개!), 콩물, 흑임자죽으로 이뤄진 세트메뉴가 단돈 2천원에 팔리고 있었다 한다. 2천원에 이 정도의 아침식사를 할 수 있는 곳은 아마 왕자다방 말고는 거의 없지 않을까 싶다. 

5.    국립생태원

일요일의 주요 목표는 국립생태원이었다. 장항역과 군산역의 위치가 현지의 수요와는 별다른 상관 없이 너무 외곽에 잡혀 있는 이유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다, 생태원 입구를 보니 예상치도 못한 파업 투쟁의 모습이 펼쳐져 있었다. 최근 공공기관에서 흔하게 일어나는 갈등, 즉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 과정에서 빚어진 갈등(실질임금 문제, 근로시간 문제)으로 보였다. 곳곳에서 선전 문구가 쓰인 조끼를 입고 유인물을 나누어주며 투쟁중인 노조원들을 마주할 수 있었다. 사측도 노측도, 처음 일어난 파업에 많은 시행착오를 겪고 있는 눈치였다. 매표를 5월 10일(파업 15일차)까지 하지 못했다거나, 정문발 셔틀을 운행하지 못했다거나, 파업가를 처음 불러보았다거나.. 상황을 경청하는 것 말고는 더 할 일이 없었던 만큼, 나는 시위 경력이 풍부한 다른 몇몇 회원들과 함께 투쟁으로 인사를 드린 다음 《철의 노동자》를 불러 드렸다. 

생태원의 도시적 규모(실제로 생태원 부지 넓이는 군산 구 조계지, 즉 각광받고 있는 구시가지의 넓이와 비슷하다), 그리고 이 안에 열대우림부터 극지까지 지구의 모든 것을 축소판으로 집어넣으려는 방대한 시도에 대해 여기서 다시 해설을 시도할 필요는 없을 듯하다. 대중적 호응도 상당해, 눈으로도 보더라도 버스를 대절해 단체로 놀러 온 어르신들이 관내에 가득했고, 관람객 데이터를 보더라도 개장 5.5년만에 5백만을 돌파했다는 사실도 확인 가능했다. 학계와 정부가 함께한 충실한 노력을 대중들도 알아보는 듯하다. 물론, 길 옆에 다윈의 존영을 새긴 부조를 모셔두었다거나, 산책로의 이름을 ‘찰스 다윈·그랜트 부부길’, ‘제인 구달길’, ‘소로길’로 붙여넣은 것은 살짝 뜬금 없다는 느낌을 받긴 했다. 또한 비록 장항역을 이용할 수는 있으나, 생태원 관람을 마치고 장항이나 군산 방면으로 이동할 때 주변 연계 동선을 오직 자동차로만 구성해야 한다는 사실은 매우 심각한, 그리고 반생태적인 설계라고 감히 평가할 수 있다. 단기적으로는 셔틀 버스 노선이나 자전거 도로망, 장기적으로는 철도망을 구축해 자동차를 줄여야 명실상부한 생태 관광이 될 수 있다고 본다. 장항과 군산을 잇는 동백대교에 아직 정규 버스 노선이 없을 정도이니, 갈 길이 멀다.

6.    임피역
금강 하구둑을 건너 게장을 파는 ‘계곡가든’에서 점심식사를 했다. 식사 후, 전체 인원의 40% 정도만 남아 임피역으로 향했다. 

임피역은 1924년 건설된 역이다. 이 역은 역에서 북으로 약 8km 떨어진 지금의 임피면치를 배후지로 하는데, 이 지역은 과거 백제때부터 지금의 군산항이 건설, 개항할 때 까지 이 일대의 중심지로서 주변 옥구현, 회현현을 속현으로 거느린 행정 중심지였다. 물론 지금은 역이 폐지된 것에서 볼 수 있듯 오래된 향교만이 천 년 세월을 증언하는 지역일 따름이다. * 

임피역과 배후지의 거리가 멀다는 사실은 잠시 기시감을 들게 만든다. 지금의 군산역, 장항역이 비록 하구둑 덕이지만 도시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모습과, 임피면치와 철도 사이의 거리가 멀찍이 떨어져 있는 모습이 서로 비슷하기 때문이다. 터널과 절토를 피하기 위해 과거의 중심지를 벗어난 철도는, 천 년 넘는 시간이 누적된 중심지를 외진 곳으로 전락시키는 힘을 보여주었다. 

지금의 임피역은 1924년 건설된 건축물을 중심으로 작은 공원이 조성되어 있는 상태다. 옛 새마을 객차에 조성된 역사관, 시비, 구 화장실 건물, 옛 방송 시설, 일제시대 당시의 항쟁이나 철도 관련 자료들 모두가 흥미롭지만, 이 역의 묘미는 바로 100년째 역 앞 본선이 그대로 사용되고 있다는 점에 있다. 조금 더 오래된, 그리고 인근에 위치한 전라선 춘포역의 경우 본선이 이설되어 그 앞으로 열차가 다니는 광경을 지켜볼 수 없는 상태다. 임피역을 여행을 마무리하는 장소로 선택한 이유는, 바로 100년간 군산과 전국을 연결해 준 열차가 지금 이 순간에도 임피역 앞 승강장을 달리는 모습을 보여드리고 싶었기 때문이다. 

박물관 등지에서 이뤄지는 기계류의 보존은 크게 두 종류로 나뉜다. 정태보존은 기계의 외양이 부식하지 않도록 남겨두는 것을 말한다. 반면 동태보존은 언제라도 기계를 기동 가능한 상태로 보존해 두는 조치를 말한다. 당연히 정태보존에 비해 동태보존에는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하지만, 그만큼 더 많은 감동을, 그리고 더 많은 이야기를 길어올릴 수 있는 보존 방법이기도 하다. 그런데 다른 많은 간이역들은 현재 본선을 잃은 상태인 만큼 말하자면 정태보존된 상태이지만, 본선이 그대로 살아 있는 임피역은 열차가 오늘도 달리고 있는 만큼 동태보존된 상태라고 말할 수 있다. 2-3년쯤 뒤 본선이 지금 임피역 남측에 건설중인 신선으로 이설되기 전, 현재의 동태보존된 임피역을 보아 둘 필요가 있다. 

*문호 채만식이 임피면치, 읍내리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7.    마무리

지리적 배경 위에서, 조작 가능한 수단을 자원의 한계 내에서 동원하여 시간적으로 한 줄로 늘어선 경험을 직조하는 행위. 아마도 여행에 대한 가장 중립적, 서술적인 정의일 것이다. 몇 가지 수단을 동원해 직조한 이번 열정위 소풍의 경험은, 특히 지역 발전의 방향을 바꾸는 데 부분적으로 성공한 금강 하구 양안의 모습을 눈으로 확인했다는 데 의미가 있었다. 개발의 속도에서 벗어나 일제시기부터의 시간 축적을 보여주는 낡은 시가지가 여행객들을 끌어모으고 있으며, 90년 묵은 동 제련소 굴뚝 옆에서는 자원관과 생태원이 수백만 명의 사람들을 불러모으고 있다. 또한 이러한 방향 전환의 중대한 축을 생물학에 기반한 두 시설이 제공했다는 사실은, 과학기술의 각 분야와 도시의 발전 사이의 관계에 대해서도 성찰하게 만드는 중요한 계기였다. 물론 지금도 방대한 제조업 시설이 군산 서측, 금강구 남안 15km에 걸쳐 뻗어 있지만, 공업 기술이나 수송 기술이 아니라 생물학이 도시의 발전과 개발의 주인공으로 등장할 수 있다는 가능성 그 자체만으로 금강 하구의 사례는 주목할 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