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24일 토요일에는 ESC 과학문화위원회(위원장 이정모)가 야심차게 준비한 ‘어른이들의 랩 어택’ 첫 번째 행사가 있었다. 이화여대 과학교육과 문공주 연구교수와 연세대 시스템생물학과 발생학 연구실의 이지현 박사가 동을 뜬 자리였다.

 

황금 같은 토요일 오후, 초파리들을 보겠다고 온 스무 명의 어른들이 아이들처럼 눈을 빛냈다. 아는 것도 많고 호기심도 많은 어른들이라 문답마저 팽팽했다. 열기는 뒤풀이자리까지 이어졌다. 서로가 서로의 팬이라고 고백했고, 누가 말 한 마디만 해도 빵빵 터졌다. 이 눈빛, 이 열기, 이 웃음... 나는 그걸 기록해보려고 한다.

 

일러스트: 김명호 작가 제공

 

참석자들은 ESC의 회원이거나 ‘과학책읽는보통사람들(대표 이형열)’의 멤버들이었다. 우리들은 모두 ‘과학덕후’였다. 어린이 ‘과학영재’들은 어디서나 칭찬 받지만, 어른이 과학덕후들은 어지간해선 환영받기 힘들다. 당장 먹고 살기도 힘든 판에, 부동산도 주식도 자녀교육도 아닌 과학이라니. 무슨 팔자 편한 취미생활인가 싶어서일지도 모른다. 철없고 외로운 어른이들은 동지를 만난 듯 행복해했다.

 

초파리 관찰도 관찰이었지만, 윤신영 <과학동아> 편집장이 알고 보니 윤태웅 ESC 대표 못잖은 커피 마니아인데, 갓 내린 커피향을 맡고 모여드는 초파리 친구들을 ‘초피’라고 부르는 ‘변태’였다는 고백을 들으며 폭소를 터뜨리거나(정작 초파리 연구자인 이지현 선생은 이름을 붙여줄 정도로 마니악하지는 않다고 함), 실린더에서 나고 자라 소멸하는 초파리의 일생이 우리네 인생과 크게 다르지 않다며 고개를 끄덕이는 체험을, 달리 어디서 해볼 것인가.

 

우리는 열 명씩 두 조로 나누어 랩을 돌았다. 우리 조엔 유독 여자들이 많았다. 그래서였는지는 몰라도, 실린더 속의 초파리들에게 감정이입한 여자들이 던지는 질문과 답변은, 자못 철학적이기까지 했다.


  “걔네들은 그럼 그 실린더 안에서 태어나 죽는 건가요?” 
  -네, 여기가 요람이자 무덤인 셈이죠. 
  “불쌍해라, 한 번 제대로 날아보지도 못하고.” 
  -일장일단이 있어요. 얘네들은 자연상태의 초파리들보다 오래 살아요. 야생 초파리들은 날아보기도 전에 포식자에게 죽거든요. 두 배쯤 오래 살고, 또 많이 하다 죽죠. 자손도 많이 보고요.


자연 상태의 동족들보다 오래 산다는 것, 유전자를 다음 세대에 남긴다는 것, 금수저든 흙수저든 새끼들에게 똑같은 환경을 물려준다는 것. 그건 초파리들의 입장에서 좋은 걸까, 나쁜 걸까. 때로 유전자 변형의 대상으로 쓰이거나 해부당할 위험은 있지만, 대체로 그렇다고 했다. “많이 하다 죽는다”는 말에 우리는 배꼽을 잡고 깔깔거렸다. 너도 하고, 나도 하는 것, 어쩌면 너도 하지 않고, 나도 하지 않는 것. 아아, 대체 그게 뭐라고.

 

쉬는 시간에 수컷 초파리가 앞발을 들고 다른 초파리를 공격하는 동영상을 보고 있자니, 미국의 유명한 천문학자이자 과학 커뮤니케이터인 닐 타이슨(Neal Tyson)이 얘기한 바, “지구는 외계인이 만든 동물원일 수 있다”는 말이 생각났다. 외계인으로 치자면 어린아이에 불과한 지능을 가진 지구인들이 서로 잘났다고 다투며 복닥대고 살아간다는 거다. 유리 실린더 못잖은 유리 동물원 속의 인생인 셈이다. 현미경적으로 축소하거나 천체망원경적으로 확대하거나, 산다는 건 슬픈 일이다. 그러니 즐거운 일이 있으면 충분히 즐겨야 한다. 어른이들의 랩투어처럼 말이다.
 

이 자리의 기획자이며 이대에서 서대문구가 선발한 어린 과학영재들을 가르치는 문공주 선생은, “아이들이 여기 모인 어른이들의 반만이라도 기뻐해주면 좋겠다”고 한숨지었다. 강남만큼은 아니어도 이미 선행에 노출된 과학영재들은 호기심을 가질 기회를 잃어버렸다고 했다. 스스로 궁금해 하기도 전에 쏟아져 들어오는 지식에 눌리고, 미리 시작된 공부 레이스에 지쳐 모든 것에 시큰둥해 한다는 거다. 신기한 것에 반응하는 시간은 잠깐, 어떻게든 짬을 내 게임을 하고 싶어 한다고 했다.

 

그런데 이 어른이들은 초파리 실험실이 너무 궁금한 나머지, 랩어택 공지가 뜨자마자 득달같이 이메일을 보내는 수고를 감수한 이들이었다. 저마다 바쁜 사연이 있는 사람들이었지, 개중에 한가로이 노는 이는 하나도 없어 보였다. 그 중에 주부가 한 분 있었다. 누구든 주부를 가리켜 ‘집에서 노는 여자’라고 표현하는 이가 있다면, 나는 그 사람을 두고두고 미워할지도 모른다.

 

내 경험을 돌이켜 봤을 때, 주부야말로 가장 바쁘고 터프한 직업이었다. 근무시간은 밤낮없이 길고, 책임의 영역은 무한대였다. 한 일은 표가 나지 않고, 하지 않은 일은 금세 테가 났다. 가장 최악인 건 노동의 대가가 무급이라는 점이었다. 심지어 마땅한 존중마저 받지 못하고 무시당하기 일쑤였다.

 

그런 주부가 시간을 헐어 과학을 공부한다니 존경심이 일었다. 알고 보니 그는 오랜 미국생활을 정리하고 들어와 '과학책읽는보통사람들' 활동을 하고 있다고 했다. 아들딸은 다 키워 각기 대학에 보냈는데, 존스홉킨스에 다닌다는 따님이 하는 분야가 바로 시스템생물학이었다. 딸의 분야를 들여다보러 주말을 잘라낸 엄마라니 멋지지 않은가.

 

걸스로봇 행사 사진 - 이진주 제공 제공

걸스로봇 행사 사진 - 이진주 제공

나는 과학자도 기술자도 공학자도 아니다. 박사도 연구원도 교수도 아니다. 얼마 전까지는 제주로 낙향해 두 아들을 키우는 주부였고, 혼자서 학회를 쫓아다니거나 더듬더듬 논문을 찾아 읽고 키트를 조립하는 로봇 덕후였다. 한때의 과학영재였지만 재수하며 문과로 길을 튼 이후, 산만한 커리어의 어느 한 부분도 과학과는 연이 닿지 않았다. 실패한 영재라는 자의식은 나를 오래 좀먹었다. 나는 나를 이무기라고 생각했다. 용이 되지 못한 한을 품고 사는 못난이 말이다.

 

지난해 말, 사회적 기업 성격의 <걸스로봇>을 창업한 건 어쩌면 그런 한풀이였을지도 모른다. 여학생들을 위한 페미니즘적 시각의 온라인 과학 미디어부터 여성 과학기술인들의 네트워킹 파티까지, 더 많은 여성들의 이공계 진출과 생존을 위한 그림을 이모저모 그려보고 있기는 하지만, 아직도 과학기술인 모임에 나가면 부끄러워 온몸이 배배 꼬인다.


ESC는 그런 내게도 기꺼이 문을 열어주었다. 심지어 여성과 지역성(제주)을 대표한다며 이사 자리까지 떡하니 맡겨주었다. 내게 그런 자격이 있는지는 지금도 의문이다. 언제든 옷을 벗으라면 벗을 각오가 돼 있다. 다만 <변화를꿈꾸는과학기술인네트워크>라는 이름을 지을 때, 과학자나 기술자나 공학자가 아니라 ‘과학기술인’이라는 느슨한 단어를 쓴 데엔, 나나 초파리 랩을 함께 방문한 주부 같은 이들에 대한 깊은 배려가 있었던 것 같다. 바로 그 배려가 ESC의 일을, 바로 내 일처럼 여기게 하는 동력이었다.


내가 보기에 그동안의 과학은, 남성 전문가들을 위한 과학, 어린이들을 위한 과학교육에 한정돼 있었다. 2014년 현재 공학을 전공하는 여학생의 비율은 16.1%(종로학원하늘교육), 2013년 현재 여성 과학기술인력 중 정규직의 비율은 13.7%, 관리직의 비율은 7.1%(WISET) 정도다. 같은 전문가들 중에서도 정규직이나 관리직 자리는 10% 내외에 불과하다는 뜻이다. 

 

내가 굳이 ‘남성 전문가들의 과학’이라고 부른 건 그래서였다. 이렇게 말하는 것이 불쾌하게 여겨지는 분들도 계시리라. 탁월한 남성 연구자들도 정규직을 얻기 어려운 시대에, 여성 할당제 덕분에 자리를 꿰차는 것처럼 보이는, 성별이 다른 동료들을 의심하지 않기란 어려운 일이라는 걸 안다. 이건 ESC 내부에서도 앞으로 많은 대화를 통해 입장을 정하고 함께 풀어가야 하는 문제리라.

 

또한 어린이들을 위한 과학교육이 어떤 형태로 왜곡돼 있는지는, 위의 과학영재들 사례에서도 짐작하실 수 있으리라. 과학적인 사실과 지식을 남보다 더 빨리, 더 많이 욱여넣는 것이 과학영재교육이어서는 안 된다. 우리가 생각하는 과학적인 합리성이나 과학하는 자세 같은 것은 그런 식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스스로 랩투어에 나선 어른이들의 눈빛과 열기, 직접 보고 만지고 발견하는 데서 오는 순정한 기쁨 같은 것을, 더 많은 아이들과, 더 많은 어른이들과, 특히 과학에서 오래 소외돼 왔던 더 많은 여성들과 함께 나누고 싶다.

 

내 ‘출신성분’에 대한 자격지심 때문인지는 몰라도, 나는 과학자와 과학자가 아닌 사람들 사이에 선을 긋는 일에 모종의 아픔을 느낀다. 좋은 과학자와 나쁜 과학자, 진짜 과학자와 가짜 과학자를 감별하는 일에도 조심스럽다. 내 스스로 과학자를 참칭하지는 않지만, 과학의 중심부에서 또는 언저리에서, 그 아름다움을 전하는 ‘무당들’의 존재는 무척이나 소중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지식을 독점하지 않는다. 그들은 자신들의 재능을 대중을 위해 쓴다. 그들은 과학적인 지식생산의 어느 단계를 지나, 기꺼이 과학대중화의, 과학교육의 도구가 됐다. 단순히 개인적인 부나 명예나 인기를 탐한다고 폄훼할 일만은 아닌 것이다. 가까운 옛날의 ‘아폴로 박사’ 조경철이나 오늘날의 ‘로봇 다빈치’ 데니스 홍은 정확히 같은 일을 하고 있다. 그들의 스타성은 더 많은 이들을 과학으로, 혹은 공학으로 빨아들인다. 모두가 의사, 법관, 공무원이 되려고 하는 시대에, 그들은 대단히 귀한 자원이 될 터다.


어쩌면 나 역시, 그 비슷한 기회를 얻은 셈이다. 나는 무당이란 말의 의미가 무언지, 잘 알고 있다. 어떤 종류의 우연과 필연이 겹쳐 나는 이제 과학하는 기쁨을 아는 몸이 되었다. 그 기쁨이 나를 관통해나가 새로운 시대의 언어가 되기를 빈다. 

 

비록 칼 세이건(Carl Sagan)도, 닐 타이슨도, 리사 랜들(Risa Randall)이나 제인 구달(Jane Goodall)도 아니지만, 한국의 상황에서 비슷한 일들을 하는 존재를 발견하고 관찰하고 증언하는 일만 할 수 있어도 행복할 것 같다. 나를 통해 더 많은 주부들이, 더 많은 여학생들이 그런 행복을 누리기를 바란다. 우리는 너무 오래, 과학하는 즐거움을 잊고 살았다.

 

동아사이언스 원문 읽기: http://www.dongascience.com/news/view/14093